우리나라 최초의 직업화가, ‘호생관 최북’

‘반 고흐’ 하면 자신의 귀를 자른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불운한 천재 화가로 흔히들 기억한다. 그의 이런 기행을 두고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예술가의 치기라고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도 ‘반 고흐’ 못지않은 경악할 만한 기이한 행적과 보물 같은 작품들 그 이름을 떨치는 예인이 있다. 김명국, 장승업과 함께 조선 3대 기인 화가로 손꼽히는 ‘호생관 최북’이 그 주인공이다. 최북 선생은 분한 치기를 이기지 못해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버린 애꾸눈 화사로 유명하다.

‘최북 초상화’ 작자미상.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북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화가로서 중인 출신이다. 본관은 ‘무주’, 초명은 ‘식’, 자는 ‘성기’, ‘유용’, ‘칠칠’이며 호는 ‘월성’, ‘성재’, 기암‘, 거기재’, ‘삼기재’, ‘호생관’이다. 선생의 가계에 대해서는 ‘경주’라고 하는 주장과 ‘무주’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가환’은 경주 최씨, <적성지>와 <진휘속고>, <일사유사> 등에는 무주 최씨로 소개되어있다. 이러한 설들과 관련 없이 최북은 자신을 무주인이라고 말하였고 그의 생애와 관련하여 전하는 내용을 볼 때 주로 무주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로서 영조 때는 ‘국수’로도 칭송받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많은 기행을 일삼았으므로 그를 칭하는 별칭 또한 많았다. 본인의 이름인 ‘북(北)’을 파자하여 지은 ‘칠칠(七七)’,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호생관(毫生館)’, 담대하고도 자유분방한 필치로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 메추라기 그림을 잘 그려 ‘최메추라기’, 거만한 양반들이 자신을 “어이 거기”라고 부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지은 ‘거기재(居其齋)’ 등의 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성정의 소유자인 선생은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자신을 ‘호생관’, ‘칠칠’이라고 칭하며 바람처럼 야성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당대 유명한 화원인 ‘김홍도’, ‘김득신’, ‘이인문’과 교우했으나, 속박되는 것을 싫어하여 제도권의 도화서 화원은 마다했다고 한다.

최북이 활동하신 시기에 중인들의 문화 활동과 신분 상승 운동이 활발하던 때라 선생 또한 시·서·화를 겸비한 화가로서 활동하였다. 자유분방한 성향으로 인해 주류 권력층이 아닌 당시 비주류였던 남인 소론계의 지식인들과 친분이 있었는데 ‘성호 이익’과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성호 이익은 후일 정식 화원이 아닌 개인 수행원으로 따라간 1747년 통신사행 때, 최북에게 송별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최북의 ‘표훈사도’. 출처 : 네이버백과

삼십 대부터 명성을 얻은 선생은 산수, 인물, 영모 등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사람들이 그가 평양이나 동래 등에 그림을 팔러 가면 구름 떼처럼 그의 그림을 얻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통신사행을 다녀온 뒤 일본에서도 유명해져 귀국 후 일본인들이 평양까지 와서 선생의 그림을 얻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통신사행 때 일본에서 육 개월 가까이 활동한 관계로 선생의 화첩이 일본에 남아있고 산수화도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특히 4, 50대에 전국을 주유하며 많은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였다고 전하는데, 그림을 팔아 그 경비로 경치 좋은 곳을 주유하였고 이때 탄생한 위대한 예술혼이 깃든 걸작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하루에 5, 6되의 술을 마실 정도로 애주가였으며 어찌나 술을 좋아했던지 금주령이 시행되던 때에도 상가에 가서 거짓으로 곡을 하고 술을 얻어 마실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술을 사기 위해 집 안의 책, 종이, 천까지 모두 털어 술을 사 마신 주광이었다. 술과 관련된 기괴한 일화도 전해지는데, <금릉집>과 <호산외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금강산 구룡연을 구경하고 술에 취해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하며 투신하여 주변인들의 만류로 미수에 그쳤다고 전한다. 이렇게 그에게 생명수와 같은 술은 예술을 위한 원동력이자 가난한 현실을 잊을 망우물이었을 것이다.

주관이 뚜렷한 치기 어린 성격은 그가 작품을 팔 때 행보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돈이 없는 이라도 선생의 작품을 제대로 알아보면 적은 값에도 거저 주다시피 하나, 부유한 이들이 거들먹거리며 작품을 요구할 때는 그림을 찢어버리든가 욕을 하며 쫓아냈다고 한다. 특히, 애꾸눈 화사가 된 일화는 선생의 이러한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어떤 양반이 그림을 요청해놓고 작품에 흠을 잡자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라고 하며 송곳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버려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선생은 반안경을 쓰며 한쪽 눈을 종이에 대고 그림을 그려야 할 정도로 불편한 몸이 되었으나 죽을 때까지 꼿꼿한 성정을 굽히지 않았다고 하니 자신과 작품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북의 ‘산수도’. 출처 : 고려대학교 박물관

바둑 실력도 뛰어나 왕실 종실이었던 서평군 ‘이요’와 대국 일화도 유명하다. 한 수 물러달라고 서평군이 청하자 일수불퇴를 주장하여 신분과 관계없이 정당한 원칙을 주장할 정도로 타협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평생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으나 가난을 면치 못한 선생은 추운 겨울 술을 마신 후, 한양의 성곽 구석에서 홑적삼 차림으로 얼어 죽었다고 전한다. 이때 나이 49세였다고 하는데, 최근 북한 자료를 기반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그가 75세에 사망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당시 49세에 선생이 죽었다고 하고 이 때문에 선생 스스로가 살아생전 49세에 죽을 것을 예감하고 자를 ‘칠칠’로 정했다는 풍문이 돌았던 것은 그의 신비롭고도 담대한 기행으로 인해 그 안타까운 죽음을 보다 의미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싶어 했던 동시대인들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난하게 살았으나 뚜렷한 주관과 강한 자부심으로 바람처럼 거침없이 살다간 최북. 그가 남긴 이 시 한 편에서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은 호방함이 절로 느껴진다. 똑같은 일상에 쫓기며 복잡한 사회 조직 속에서 상호 반응을 신경 쓰며 피곤하게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선생의 시는 청량한 휴식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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